Scroll Down
한라봉 막걸리, 유자 막걸리, 청포도 막걸리, 곰취 막걸리 등 MZ세대 사이에서 할매니얼(복고) 트렌드가 인기를 얻으면서 새로운 식재료를 접목한 이색 막걸리들이 쏟아지고 있다. 그 가운데 요즘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막걸리는 단연 바질 막걸리다. 농업회사법인 상주주조에서 개발한 바질 막걸리 ‘너디호프’는 국내 최고 권위의 주류 시상식인 ‘2023 대한민국 주류대상’ 전통주류 부문에서 대상을 받은 데 이어, ‘제2회 대한민국 막걸리 엑스포’에서도 화제를 모았다.
막걸리와 바질이라, 얼핏 상상이 가지 않는 조합이다. 너디호프를 개발한 농업회사법인 상주주조의 대표 이승철 동문은 바질의 싱그러운 향이 꿉꿉한 막걸리의 맛을 잡아줘 서양 음식과도 제법 잘 어울린다고 소개했다. 와인을 대체할 수 있는 막걸리인 셈이다.
“주류대상에서는 콜드브루 방식으로 침출한 생바질의 풍부한 향과 산미의 깔끔함이 심사위원들에게 좋은 점수를 얻었습니다. 바질을 넣었다고 하면 평소 막걸리보다 와인을 즐기던 사람들도 관심을 보이곤 합니다. 맛을 본 후에는 생각보다 맛이 좋다며 구매로 전환되는 비율이 높은 편이죠.”
막걸리에 대한 선입견을 무너뜨린 바질과 막걸리의 조합은 MZ세대도 사로잡았다. 편의점 GS25에서 청년 사업가가 개발한 막걸리와 전통주 등을 선보이는 ‘힙걸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데, 그 첫 번째 주자로 상주주조가 뽑혔고 출시 첫날 사전 예약 물량이 동났다. 한 달간 매출은 250%나 뛰었다. 이승철 동문은 너디호프가 사랑받는 이유는 단순히 호기심을 자극하는 참신함에만 있지 않다고 강조했다.
“막걸리와 바질이라는 ‘신박한’ 조합뿐 아니라 기본기도 탄탄한 제품이기 때문에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좋은 술을 만들겠다는 목표 아래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거든요. 실험을 반복하던 가운데 운 좋게 좋은 산미를 내는 유산균을 배양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바질을 뜨거운 물에 추출하면 향미가 좋지 않은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커피의 콜드브루 기법을 도입했죠.”
너디호프의 ‘호프’는 바질의 꽃말이고, ‘너디’는 농업회사법인 상주주조의 브랜드명인 ‘너드브루어리’에서 따온 말이다. ‘너드(Nerd)’라는 말은 원래 ‘멍청하고 따분한 사람’, ‘컴퓨터만 아는 괴짜’라는 뜻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특정 분야에 빠져 열정을 쏟는 사람을 가리키는 긍정적인 의미로도 쓰인다.
“브랜드명을 지을 때 술에 빠져 있는 저의 정체성을 담고 싶어 너드라는 말을 붙였습니다. 술을 정말 좋아하거든요. 화학적 구조를 변경해 좋은 술을 만들어보겠다는 생각에 전공도 화학과로 바꿨을 정도입니다.”
원래 컴퓨터공학을 전공했던 이승철 동문은 군대 전역 후 화학과로 편입했다. 학부 시절 식품영양학과 수업까지 섭렵하는가 하면, 수제맥주 양조장이나 경북 문경에서 ‘오미나라’라는 양조장을 운영하는 이종기 대표에게 양조법을 배우기도 했다. 그리고 대학 졸업 후 국내 굴지의 주류회사들에 입사지원서를 내밀었다. 하지만 취업의 문턱은 생각보다 높았다. 번번이 고배를 마셔야 했던 이승철 동문은 주류회사에서 자신을 뽑아주기를 마냥 기다리기보다 직접 주류회사를 차리기로 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중 이종기 대표님께서 지원사업이 잘 갖춰져 있는 경북으로 내려와 양조장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연고는 없지만 2021년 감, 배, 망고, 허브 등 지역 특산물이 풍부한 상주로 내려왔습니다.”
알고 보니 서울 영등포에서 나고 자란 서울 토박이라는 이승철 동문. 그는 우선 경북 상주에서 6개월간 귀농 · 귀촌을 지원하는 ‘농촌살아보기’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그 기간 외지에서 온 젊은이의 열정을 물심양면으로 응원해 주는 상주의 훈훈한 인심에 큰 힘을 얻어 2022년 상주시의 청년창업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농업회사법인 상주주조를 차리게 됐다.
“제가 열심히 하는 만큼 관심을 가져주는 점이 서울과 달랐습니다. 서울에서는 주변에 신경을 쓰기 어렵잖아요. 상주로 내려와 관공서나 농가 등을 찾아다니며 정보를 얻고 도움을 청했는데 다들 성심성의껏 도와주셔서 사업 아이템을 정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이제 어엿이 상주인으로 통하는 이승철 동문은 상주 생활에 완벽 적응했음은 물론이고, 바질 막걸리를 필두로 상주의 찹쌀로 만든 찹쌀 막걸리와 로즈마리 막걸리, 체리 막걸리 등을 잇달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막걸리에만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다. 조만간 바질과 탄산을 가미한 약주도 선보일 예정이다. 최종 목표는 위스키 못지않은 풍미를 자랑하는 증류주를 만드는 것이다.
“오크나무가 자라는 데 100년이나 걸리기 때문에 위스키 제조에 큰 비용이 듭니다. 그래서 한약재를 활용해 위스키의 풍미를 즐길 수 있는 우리 술을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아직 세계 시장에서 우리 술의 입지가 크지 않은데 우리 술 시장을 확대하는 데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그래서 올해 목표 중 하나가 일본에 바질 막걸리를 수출하는 것이다. 이미 주류 박람회에서 만난 일본 바이어들에게 맛으로는 인정받았다. 이제 위생 기준을 충족하는 대량 생산시설만 갖추면 되는데 최근 다행히 원하는 조건의 생산공장을 찾았다. 이승철 동문의 또 다른 바람은 좋아하는 술을 만드는 것을 넘어 상주에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해 지역과 함께 발전하는 것이다.
“이공계 학생들이 졸업할 때가 되면 대기업이 몰려있는 경기도 이천행을 택하듯이, 상주에 주류 제조 기반을 조성해 젊은이들이 상주살이를 택하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창업을 염두에 두고 있는 한양 후배들에게는 지방행도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조언해 주고 싶습니다. 서울보다 더 많은 기회와 가능성을 찾을 수 있거든요.”
이승철 동문 같은 열정 넘치는 젊은 지역 사업가가 있는 한 지방의 발전은 희망적일 것이다. 인터뷰 말미, 이승철 동문은 후배들의 행사에도 막걸리를 협찬하고 싶다는 말을 전했다. 한양 동문의 열정이 담긴 새로운 전통주, 너드브루어리를 다 함께 맛보고 싶다면 주저 말고 이승철 동문에게 연락해 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