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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사회에는 인공지능(AI) 딥페이크 기술로 허위, 기만 정보가 확산하기 쉽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현명하게 의심하고 진위를 파악해야 한다. 높은 수준의 디지털 리터러시와 깊이 있는 사고가 요구된다. 또 미래 사회에는 챗GPT처럼 인간의 작업을 보조하는 AI가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 보편화될 것이다. 이에 따라 인간에게는 직접 데이터를 취합하고 작업하는 게 아니라, AI가 데이터를 취합하고 작동하도록 지시하는 역할이 주어질 것이다. AI와 함께 살아가야 할 미래 사회에서는 생각하는 힘, 질문하는 능력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역량으로 자리매김할 전망이다.
2023년 가을, 한양대에서는 ‘HY ASKTHON(이하 애스크톤)’ 대회가 개최됐다. 애스크톤은 질문을 의미하는 ‘ASK’와 ‘해커톤(Hackthon)’의 뒷글자를 따 지어진 명칭이다. 이름 그대로, 질문으로 경연을 펼치는 이 대회는 국내 대학 최초로 시도된 ‘빅 퀘스천(Big Question)’ 대회다. 빅 퀘스천은 정해진 답은 없으나 깊은 사고를 불러내 우리 사회와 인류의 변화를 모색하는 출발점이 되는 질문을 뜻한다.
이번 대회는 한양대가 새로이 제시하는 교육혁신 패러다임 ‘질문중심학습(Question-Based Learning, 이하 QBL)’을 구체화하고, 학생들의 경계 없는 지식탐험을 촉진하려는 취지에서 마련됐다. 총 163팀, 213명의 학생이 참여했으며, 2단계 예선을 거쳐 최종 6개 팀이 본선에 진출했다. 창의적 사고능력을 질문으로 표현한 참가 학생들의 프레젠테이션 경연과 심사패널 라운드 테이블을 중심으로 한 다채로운 세션이 진행됐다.
이번 대회에서 학생들은 ‘우리는 몇 초마다 생각하는가?’, ‘4차 산업혁명 시대, 가치 있는 노동은 무엇인가?’, ‘이번 달 개인 탄소세는 얼마입니까?’, ‘문학은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등 신선하고 도전적인 질문을 제시해 눈길을 끌었다. 이중 ‘4차 산업혁명 시대, 가치 있는 노동은 무엇인가?’를 질문한 ‘물어보기’ 팀[박근우(건축학부 17), 이가홍(중어중문학 & 연극영화학 19)]이 최우수상을 받았다.
국내 대학 최초로 추진된 애스크톤은 AI가 만들어갈 세상을 대비하는 한양대의 전략이자, QBL을 통한 대학 교육혁신의 첫 단추였다. 한양대 구성원이 한양 교육의 미래를 함께 고민하고, 질문을 던지고, 사고융합의 장을 여는 시간이 됐다.
QBL은 ‘질문을 던지는 능력’을 향상시키고, 질문을 통해 능동적으로 지식을 탐구하고 생각하는 능력을 기르도록 이끈다. 한양대는 QBL을 추진함으로써 대학 수업에서 배운 내용을 토대로 학생 스스로 질문을 형성하고 전공을 넘나드는 융복합형 인재로 성장하게끔 지원할 계획이다. 한양대는 ‘수용하는 학습자’에서 ‘탐험하는 능동적 학습자’로 한양의 인재상을 새롭게 확립하고 AI 시대를 선도해 갈 방침이다.
2023년 10월 어느 날. ‘졸업 전에 대회 상금 타서 두당 250만 원씩 받아 보자고!’ 그렇게 시작은 1등 상금 500만 원, 인센티브에 한없이 취약해진 졸업반 학생들의 작당에 가까웠다. 하지만 작당을 했으면 그에 준하는 적절한 모의를 해주는 게 인지상정. 명확했던 것은 외재적 동기지만, 넘쳐났던 것은 내재적 동기다. 대회에 참가하자고 마음먹고 보니 지난 대학 시기 동안 지나온 경험이, 하고 싶은 얘기가 한가득 있었다. 정신 바짝 안 차리면 가내 기생충 포지션이 되기 십상인 학부생이 ‘일’에 대한 고민을 한다고 하면 ‘이야, 진취적으로 진로탐색을 하는구나’ 따위의 반응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대학생이 ‘노동’에 관해 발화한다고 하면 ‘야이, 졸업하고 취업할 준비나 해’ 같은 소리를 듣기 딱 좋다.
‘노동’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여전히 양가적인 감정을 느낀다. 너무 하고 싶은 일이 있는가 하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기 싫은 일이 있다. ‘창업이냐 취업이냐’ 하던 친구들 몇은 직장이 생기더니 ‘창업이냐 퇴사냐’를 놓고 고민한다.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이라는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이직은 필수, 창업은 선택’이 된 세상에서 이런 고민은 이상한 일도 아니다. 대학 생활을 마무리하고, 인턴 생활, 협업 프로젝트, 교과와 비교과 활동 등을 돌아보는 과정에서 ‘노동’에 대한 개인적 고민이 시작되었다. 더불어 기술 발전이 초가속화되고 있는 사회적 흐름 속에서, 노동 가치의 판단 기준을 학제 간 논의를 통해 찾고 싶단 마음에서 다음 질문을 빅 퀘스천으로 선정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 가치 있는 노동이란 무엇인가?”
발표 준비 과정에서는 ‘당일 현장에 참석하는 청중들이 누구인가?’를 가장 많이 고려했다. 같은 주제더라도 담론의 ‘발화 시점이 언제인가’, ‘관여 인물이 누구인가’ 등에 따라 설득의 역학 관계가 달라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졸업을 전후해 교육 현장과 산업 현장 사이에 존재하는 가치의 괴리를 어떻게 줄일 것인가?’ 이 물음이 학습자와 교수자 모두가 가장 많이 하는 고민 중 하나라고 예상했다. 학생들에게 이 질문은 주로 ‘진로 고민’이라는 단어로 축약돼 존재하는 상황이다. 학습 주체였던 상당수의 학부 졸업생은 졸업하기 전후로 고용과 피고용의 관계 중 피고용자의 입장에 위치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빅 퀘스천에 대한 논의를 거치는 과정에서 참여자들이 이를 극단적 주종 관계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가치 있는 노동’이란 무엇인지 고민해 보면 좋을 것으로 생각했다.
한국의 대학생과 교수라는 로컬리즘에서 시작하지만, 유엔 SDGs를 기준으로 전 지구적인 규모에서도 유효할 질문을 상정했다. 충족하는 항목은 다음 두 가지다. 하나는 4번 ‘양질의 교육(Quality Education)’이며 다른 하나는 8번 ‘지속가능한 경제성장 및 양질의 일자리와 고용(Decent Work and Economic Growth)’이다. 건축학(팀원 박근우), 중어중문학과 연극영화학(팀원 이가홍)이라는 전공을 살려 여태까지의 개인적 고민을 사회적 질문으로 확대했다는 점에서 팀원 두 사람 모두 뿌듯함을 느낀다.
질문 선정 이후 노동의 역사, 주제, 언어, 주체로 세분화해 준비를 시작했다. (1) 건축사의 맥락에서 돌아본 4차 산업혁명 전까지의 시대별 변천사, (2) 감정/지식/가사/돌봄 노동 등 최근 가치가 재발견된 사례들, (3) 다양한 맥락에서 보편 활용되고 있는 ‘노동’의 현주소, (4) 인간으로 한정하여 앞으로의 ‘가치 있는 노동’ 탐구 등의 내용을 아우르는 발표를 준비했다.
졸업반 학생으로서 향후의 진로와 노동/근로에 대해 탐구한 활동을 ‘텍스트 읽기’(이가홍)와 ‘이미지 읽기’(박근우)로 정리해 보았다. 원시공동체에서는 수렵 · 채집으로 대변되는 ‘생존’이, 농업시대에서는 봉건제와 소작농을 바탕으로 한 농작물 ‘축적’이, 산업시대에서는 공장과 기계의 도입으로 인한 ‘생산성’이, 지식시대에서는 지식과 기술의 보유 활용을 위한 ‘학습력’이 노동의 가치를 결정해 왔다. 이러한 노동의 가치와 형태의 역사적인 변화는 기술혁신을 통한 새로운 발견 · 발명 및 사회적 변화에 근간했다.
‘노동(勞動, labor)’의 사전적 의미는 생존 · 생활을 위하여 특정한 대상에게 육체 · 정신적으로 행하는 활동이다. 반의어는 ‘여가’로 나타나며, 유의어는 ‘일(work)’, ‘활동’, ‘직업’, ‘사무’다. 관련해 비교적 근래에 새로 생긴 단어들은 ‘감정노동’과 ‘가사노동’이다. 이는 직업적 일터에서 요구하는 감정과 생활에 필요한 가사일 모두를 임금을 지불받는 하나의 직업 형태로 인정하는 사회적 현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장하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생장하는 존재들이다. 우리는 분명 인공지능과 기술 발전의 격변기를 지나고 있다. 앞으로의 사회에서도 이러한 사전적 정의와 단어 간 관계가 유효할까?
오늘, 2024년 봄의 어느 날. 피어나는 크고 작은 물음들을 포괄할 하나의 커다란 질문을 선정하는 과정 자체가 이 대회에 참가한 가장 큰 묘미 아니었을까. 질문 선정 시 주안점은 결코 나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영역까지 포괄하는 질문을 선정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단어에 상위어, 하위어가 있듯이 질문에도 상위질문이 있다는 가정하에, 각계에서 파생질문이 형성될 수 있을 법한 물음을 던지는 게 목표였다. 각 분야 최고의 석학들이 모여 사흘 밤낮을 토의해도 어쩌면 답이 나오지는 않을 질문일수록 좋다. 다양한 분야로의 파생질문이 만들어질 가능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문학이라면 ‘위대한 작가들은 인간의 노동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물리학이라면 ‘몸을 움직여야만 노동인가’, 경제학이라면 ‘보상이 없어도 가치 있는 노동일까’, 철학이라면 ‘괴롭고 힘들어야만 가치 있는 노동일까’와 같이.
나에게 질문은 한없이 반짝이는 중요한 거슬림이다. “내게 큰돈을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모욕을 줘요.” 얼마 전 참석한 회의에서 스치듯 날아오더니 관자놀이에 콕 박힌 한마디. ‘그런가? 교환노동이라 불리는 것은 반드시 모욕감을 수반하는가?’ 석고상같이 희고 매끈해야 하는 세계의 철두철미한 미의식에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질문을 하면 할수록 세상이 흥미로워져서 멈추기가 어렵다.
애스크톤 대회에서 수상하기 전이나 지금이나 사고의 폐쇄성을 뚫으려는 나의 시도는 한결같다. 거슬리는 회색 털 뭉치 같은 물음을 깔끔히 제거하지 않는 것.
이전에 유행했던 ‘노답’이라는 말은 정답찾기 중심의 문화에서 비롯된 비관적 상태의 표상이었을지 모른다. 시대에 대한 불안을 유아적 분리방어기제로 대처하기보다 ‘질문’을 품은 채 낙관하길 택한다면, 올해도 계절처럼 돌아올 애스크톤 대회에서 질문의 씨앗을 싹틔워보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