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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성 교수는 특이한 이력을 지녔다. 교수가 되기 전 스포츠 담당 기자로 7년여를 활동했다. 인생의 항로를 바꾼 것은 2006년 독일 월드컵이었다. 취재를 위해 독일에 머물던 그는 월드컵 취재를 6번이나 했다는 이를 비롯해 여러 외신 기자와 교류하게 됐다. 그 과정에서 베테랑 기자들이 갖춘 경험과 지식의 깊이, 스포츠를 향한 순수한 열정에 감탄했다. 문득 관련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지식을 넓히고자 선택한 도전. 하지만 다시 시작한 공부가 열정을 깨우고, 열정이 새로운 목표를 제시하다 보니, 어느새 교수의 자리에 서게 됐다.
“어떤 사건, 사실을 접하거나 논할 때 그것의 역사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지식의 깊이가 다르면 조금 더 다채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고, 남들이 못 보는 부분까지 캐치할 수 있지요.”
스포츠 역사를 공부하기로 마음먹은 이종성 교수는 근대 스포츠가 탄생한 영국에서 대학원 공부를 시작했다. 수업은 유럽이나 북미 중심 연구들이 주류를 차지했고, 아시아를 다룬다고 하면 중동이나 일본 정도가 거론됐다. 수업을 들으면 들을수록 공부하면 할수록, 우리나라 스포츠 역사에 대해 연구하고 이를 해외에 소개해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해졌다. 그렇게 연구를 시작했고 한국 야구와 지역성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일제강점기부터 2002년까지의 남북한 축구사를 다룬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종성 교수는 현재 한양대에서 ‘스포츠 문화사’를 가르치고 있다. 문화사는 인류 역사 발전에서 문화의 역할이 무엇인지 추적하는 학문이다. 종교, 언어, 문학, 음악, 미술 등 다양한 소재를 주인공으로 다룰 수 있다. 스포츠 문화사는 말 그대로 스포츠를 중심으로 인류의 역사를 파악하는 것이다. 스포츠의 역사를 단순하게 나열하는 게 아니라 스포츠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어떤 역할을 했는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탐구한다.
“같은 문화 분야지만 스포츠 문화사는 문학이나 음악, 미술 등을 주제로 하는 문화사보다 외연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포츠 자체의 역사가 길기도 하지만 스포츠의 종류가 많고 정치, 경제, 시대적 특징 등 관련된 영역이 넓기 때문입니다. 스포츠가 다른 분야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핵심적인 지점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난 2월 이종성 교수는 3년여의 노력 끝에 <야구의 나라>를 발간했다. 일제강점기부터 2000년대까지 야구가 우리 사회와 어떻게 상호작용했는지 추적한 책이다. 역사편찬위원회나 KBO가 보관 중인 자료를 활용하는 것은 물론, 과거 신문을 확인하기 위해 도서관에 보관된 마이크로필름을 수없이 훑었다. 스포츠면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면을 두루 살피는 긴 여정이었다. 일제강점기 사료는 국내 자료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일본 내 도서관과 야구 박물관 등을 수없이 답사했다. 관련 연구자나 관계자 인터뷰를 통해 살아 있는 자료도 모았다. 그렇게 폭넓은 스펙트럼의 자료를 취합해 정리했다. 여러 가지 스포츠를 즐기고, 다양한 프로 리그가 존재하는 우리나라. 그 많은 스포츠 중 야구를 주제로 잡은 이유는 무엇일까.
“개인마다 좋아하는 스포츠는 다르겠으나 그중 야구와 축구 팬이 가장 많죠. 그리고 일상에서 흔하게 접하고 큰 투자가 이뤄지는 것은 축구이지만, 연령을 초월해 일상의 대화 소재가 되는 것,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야구입니다.”
이종성 교수는 국내 요인과 국외 요인, 두 가지의 축을 중심으로 한국 야구의 역사를 파악했다. 국내 요인은 ‘상징성’과 ‘학연’이다. 일제강점기에 야구는 엘리트의 상징이었고, 이런 상징성은 광복 이후까지 이어졌다. 일제강점기부터 1990년대까지 한국 사회를 이끈 파워 엘리트들은 야구에 큰 관심을 쏟고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중요한 연결고리가 된 것은 고등학교다. 과거에는 고등학교가 대학교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당시 명문이라고 불린 고등학교들은 대부분 야구 명문이기도 했다. 고등학교 간 야구 경기가 열리고, 출신 학교를 응원하는 문화가 활성화됐다. 여기에 야구 명문고 동문들이 정·재계로 진출하며, 학교에서 시작된 야구의 영향력이 사회로까지 확장됐다.
국외 요인은 ‘일본, 미국과의 관계’다. 우리나라와 가장 많은 영향을 주고받은 나라를 꼽으라면 단연 일본과 미국일 것이다. 야구는 이 두 나라에서 가장 사랑받는, 인기 있는 스포츠다. 6.25 전쟁 이후 냉전 시대를 살아가며 우리나라는 이 두 나라와 삼각동맹을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에 따라 뭔가 교류할 거리가 필요해졌는데 야구가 그 중간 다리 역할을 수행했다. 또 선진국에서 인기 있는 스포츠로 대중의 선망을 받게 됐다.
“사실 야구는 오랫동안 올림픽 종목도 아니었고, 아시안게임 종목도 아니었습니다. 한국 체육의 오랜 캐치프레이즈가 국위선양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야구의 발전과 인기는 우리 사회에서 무척 이례적인 일이죠. 하지만 야구 명문고에서 시작돼 사회 곳곳으로 퍼져나간 학연과 인맥에 더해 일본, 미국과의 필연적인 관계가 야구 성장의 원동력이 됐습니다.”
1981년 12월 KBO 창설과 함께 1982년부터 프로 야구의 시대가 열렸다. 우리나라 프로 스포츠 리그 가운데 가장 먼저 포문을 연 야구. 이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야구의 발전에는 지역성과 지역감정도 큰 역할을 차지했다. 야구 구단은 대부분 지역에 연고를 두고 있다. 학연을 넘어 지연으로 연결된 야구는 편을 갈라 대립각을 세우기에 더할 나위 없었다. 라이벌 팀 간의 경기가 열릴 때 열정적이다 못해 치열하기까지 한 응원전이 펼쳐지는 이유다. 그 소속감과 대리 만족은 야구의 흥행 요소로 작용했다.
“스포츠, 특히 프로 스포츠는 산업적, 엔터테인먼트적인 측면이 중요합니다. 경제 효과를 거두면서도 사람들을 즐겁게 할 수 있어야 해요. 하지만 여기에 안주하면 일시적인 유행처럼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한때 전국을 휩쓸었던 농구 열풍이 사그라든 것이 대표적이죠.”
이종성 교수는 리모델링이든 리노베이션이든 그것이 어떤 성장 과정을 거쳤고, 우리 사회의 무엇과 소통하며 영향을 미쳤는지 심층적으로 파악하는 일이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 의미에서 스포츠 문화사 관련 연구가 조금 더 활성화되면 좋겠다는 희망을 전했다. 이종성 교수는 새로운 시각으로 스포츠를 조명하고자 늘 아이디어를 찾고 있다. 다음 연구로 스포츠 코스나 경기장을 부동산 요소와 연결해 연구해 보고자 관련 자료를 모으고 있다. 이종성 교수는 한양인에게 ‘르네상스 맨’이 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영국에서 공부할 때나 일본을 방문했을 때 가장 놀랐던 것은 연구자가 아닌 일반인들도 스포츠 문화 자료를 소비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자신만의 시각으로 스포츠를 풀어내는 이들도 많고요. 이것이 스포츠 강국을 만든 힘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제 우리는 AI 시대를 살아갑니다. 단순한 사실을 찾고 정리하는 수준이라면 인간은 AI를 넘어설 수 없어요. 다양한 관심사와 새로운 접근, 창의적인 사고로 지식의 외연을 넓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