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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란 신문사에서 매년 개최하는 신인 작가 발굴 공모전이다. 그중 대표적인 ‘동아일보 신춘문예’는 2025년 올해 국내 최초로 100주년을 맞았다. 중편소설, 단편소설, 시, 시조, 희곡, 시나리오, 동화, 문학평론, 영화평론 등 9개 부문으로 운영 중이다. 역사 깊은 동아일보 신춘문예는 수많은 문인이 거쳐 간 문학의 등용문. 예비 작가들이 성장할 발판이자 한국 문학에 다양성을 더해줄 창구로서, 매년 뛰어난 역량의 신예 작가를 발굴하고 있다. (주)해안건축에서 9년 차 직장인으로 활약 중인 박진호 동문이 단편소설 <어떤 진심>으로 2025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사실 당선될 거라는 기대를 전혀 하지 않았던 터라 소식을 듣고 조금 얼떨떨했습니다. ‘마흔 살쯤 돼서 습작을 열 편 정도 써 본 뒤면 등단하지 않을까’ 그렇게 막연히 상상하며, 시간을 조금 많이 잡아먹는 취미 같은 느낌으로 글을 써 왔습니다. 물론 설레고 기쁘기도 했지만 당선 당일이 지나고 나서는 조마조마한 마음이 더 컸습니다. 준비 없이 얼떨결에 등단해 버린 게 아닌가 싶기도 했고, 밑천이 금방 드러나면 어쩌나 걱정하면서 연말 연초를 보냈습니다.”
신춘문예 당선 소식에 얼떨떨한 것은 박진호 동문 본인뿐이 아니었다. 가족과 지인들, 회사 동료들도 얼떨떨하긴 마찬가지. ‘이렇게 본격적으로 글을 쓰고 있었느냐’며 그의 일탈 아닌 일탈에 조용한 놀람과 의문을 표했다고 한다. 그만큼 그가 본캐와 부캐 사이의 온-오프 스위치를 철두철미하게 관리했다는 방증일 것이다.
박진호 동문이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2022년부터였다. 등단작인 <어떤 진심>을 포함해 지금까지 총 5편의 단편소설을 썼다. <어떤 진심>은 지난해 8월부터 쓰기 시작해서 11월 말쯤 완성했다. 소설의 주인공은 고등학생으로, 초등학교 3학년부터 5학년까지 자폐증이 있는 친구와 친하게 지내며 붙어 다닌 이력이 있다. 영화 ‘레인맨’처럼 남다른 우정을 나누길 상상하기도 했지만, 주인공도 주변 어른들도 순수한 의도만 가지진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자폐증 친구는 갑작스럽게 어디론가 떠나버렸는데, 떠날 때처럼 또 갑작스럽게 주인공이 다니는 고등학교로 전학을 온다. 그러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다.
“친한 친구가 예전에 제가 썼던 다른 소설을 읽고 감상을 남겨준 적이 있었어요. 그 소설에 나온 인물의 전사가 궁금하다며 그걸 또 다른 소설로 써보면 어떻겠냐고 했죠. 당시에는 그냥 ‘그래봐도 재밌겠다’ 하고 흘렸었습니다. 그러다 지난해 여름 갑자기 영악하고 사리분별이 빠른 학생의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그 친구가 또 다른 소설로 썼으면 좋겠다고 한 그 인물의 성격과도 잘 맞을 것 같아 구상을 시작했어요.”
박진호 동문은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학생부터 어른까지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상황과, 그 안에서 각자가 내비치는 여러 층위의 진심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고 밝혔다. 장애와 입시문제, 계급 등을 소재로 사용했지만 이로 인한 표면적인 갈등보다는 저마다의 상황에서 미묘하게, 혹은 극적으로 변하는 감정들에 대해 말한다. <어떤 진심>을 쓸 때 박진호 동문은 두 가지에 신경을 많이 썼다. 첫 번째는 화자가 일방적인 피해자가 되는 구도를 피하는 것, 두 번째는 따뜻한 화해보다 냉소적인 결말로 끝맺음한다는 거였다. 조금 더 차가운 현실을 반영한 이야기가 오히려 공감을 불러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양대 도시공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에서 협동과정 도시설계학 석사학위를 취득한 박진호 동문. ‘도시공학’과 ‘소설가’라는 키워드가 매끄럽게 매치되진 않는다. 그 역시 처음부터 소설가를 꿈꿨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원래 글쓰기를 좋아하는 편이라 20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개인 블로그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사실 전공과 관련된 생각을 글로 정리해 보려는 의도로 블로그를 시작했는데 신변잡기식 일기를 더 많이 쓴 것 같아요. 계속 글을 쓰다 보니 서른 중반쯤 문득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설의 소재와 사건은 가상으로 만들지만, 주된 정념이나 주제의식은 그동안 제가 썼던 일기에서 실마리를 많이 얻는 편입니다.”
박진호 동문은 현재 건축사무소에서 도시계획과 도시설계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서울시의 광화문광장 개선 종합기본계획 수립, 신도시 마스터 플랜, 서울시 임대아파트 재건축 시의 복지 증대 연구용역 등 공공과 상업 분야를 넘나들며 프로젝트를 수행해 왔다. 바쁜 직장생활을 이어가다 보면, 평일에는 퇴근 후 1~2시간 정도 글 쓸 여유가 생긴다. 하지만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지치는 시간이니 온전히 집중하지 못할 때가 많다. 시간 여유가 많으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꼭 글을 더 많이 쓸 것 같지도 않다.
“저는 회사 일이 바빠서 짬을 내기 어려울 때, 오히려 글을 쓰고 싶은 욕구가 더 강해지더라구요. 회사 덕분에 현실감각과 규칙적인 생활을 유지해서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글을 쓸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듭니다. 무엇보다 저는 제 본업을 많이 좋아해요. 직장을 다니며 에너지와 아이디어를 많이 얻는 편입니다. 앞으로 제 전공인 도시계획과 관련된 내용을 소설화해 보고 싶은 생각도 있습니다.”
도시공학과라는 전공이 박진호 동문에게는 특별한 전환점이 된 것 같다고 강조했다. 원래 다른 공과대 소속이었는데 2학년에 올라가며 도시공학과로 전과했다. 공학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시스템과 구조, 창작과 기획, 사람에 대한 이해를 모두 다루는 종합학문이라는 점에서 도시공학은 굉장히 매력적인 분야다. 박진호 동문은 다른 공과대에 비해 토론과 논쟁, 글쓰기의 비중이 높은 도시공학과의 특성이 본인과 잘 맞았다고 설명했다.
“전공을 살려 일하는 지금도 그때 전과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전공과 적성, 직업만족도가 일치하기란 굉장히 어려운데 저는 그런 점에서 운이 좋았죠. 이제 등단이라는 기회도 얻었으니, 소설을 꾸준히 쓰면서 본업도 소홀히 하지 않도록 균형을 잘 잡아가는 게 목표입니다. 신춘문예가 끝난 지 얼마 안 된 터라 여기저기서 신기한 연락들이 많이 오는데, 조금 더 시간이 지나 분위기가 가라앉은 후에도 조급해하지 않고 천천히 글을 써나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 말미, 박진호 동문은 후배들에게 “듣고 보고 말하는 것만큼, 많이 쓰는 일상을 시작해 보라”는 조언을 남겼다. 문해력 저하 같은 문제가 아니더라도 글쓰기는 개인의 일상을 더 풍요롭게 만들기 때문이다. 일기든 산문이든 아니면 논증적인 글이든 상관없이, 지금의 생각과 기억을 쌓아두면 의외의 시기에 든든한 자산이 되고 또 현실을 버틸 힘이 될 것이다.
“내가 언제 어떤 주제로 휘둘렸고, 어떤 생각과 주장을 하며 갈등했는지, 그리고 어떤 계기로 신념이 바뀌고 또 강화됐는지, 수년간 기록된 변화 과정들을 읽다 보면 감회가 새롭죠. 또 내가 어디서 왔고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조금은 더 자신감을 얻게 되는 것 같습니다. 후배들도 차근차근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가길 바랍니다.”